교회사 특강: 중국과 기독교의 만남 (2)

◈ "기독교의 중국화"는 마테오 리치가 유교를 선교의 파트너로 삼았던 명나라(1368- 1644년) 말기부터 시도되었다.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 등은 가톨릭을 명나라의 국운을 되살릴 유럽문명의 핵심으로

이해하고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634년에는 가톨릭 평신도 자선단체인 "인회"가 조직되어 사회구제를 담당했다.

이후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1636-1912년)는 "가톨릭 금지령"을 내렸고 기독교인들을

광저우로 압송했다(1665년).

▣ "선교 주도권의 이동"

교황청에 의해 「예수회」가 해산되고(1773년) 얼마 후 「런던 선교회」가 조직되었다(1795년). 첫 번째 개신교 중국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광저우에 도착했다(1807년).

모리슨은 청나라 정부의 선교 금지 정책으로 27년동안 성경번역에 힘을 쏟아 신구약 성경을 번역 출판했다.

1816년에는 영국인 해군 장교 바실 홀을 통해 한국에 최초로 한문성경이 전해졌다.

중국대륙에서 세례 받은 개신교도가 나오자 교황 비오 7세는 칙령을 내려 「예수회」의

지위를 회복했다(1814년).

인쇄소 노동자였던 량파가 중국인 최초로 모리슨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1823년),

1827년에는 최초의 중국인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칼 프리드리히 귀츨라프(1803-1851년): 독일 출신의 폴란드계 유대인. 루터교 개혁파 신자. 조선에 발을 디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1832년)로서 마카오에 거주하면서

성경 번역과 저술 활동을 병행했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난"(1850-1864년. 기독교적인 이상으로 지상 천국인 ‘태평천국’을

설립하려 했던 대규모 내전) 당시 귀츨라프의 번역본을 그대로 사용했다.

중국 최초의 내지선교회인 "복한회"The Chinese Union(1844년)와 "중국 선교회"(1852년)가 조직되었다. 중국 선교회가 최초로 파송한 선교사는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였다.

◈ 1840년에 벌어진 "아편전쟁"Opium Wars의 결과, 영국과 청나라는 「난징 조약」 (*1842년)을 체결했고 이후 영국 성공회, 미국 장로교회, 네덜란드 개혁교회, 미국

북침례교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미국 남침례교회, 미국 감리교회, 영국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차례로 중국에 들어왔다. 1848년에는 상하이에서 선교사와 중국 선원들이

충돌한 ‘칭푸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은 서구 열강의 불평등조약을 이용해서 기독교와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교리를 선전하고 무력을 앞세워 금전적 피해를 주는 모습으로

비쳐져 중국인들의 반감을 샀다. "2차 아편전쟁"(1856-1860년) 직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고 중국선교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으나 이 시기에 교회배척운동중국 교회 자립운동 역시 시작되었다. 최초의 한글성경인 《누가복음》 번역(1882년)으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 존 로스가 「시(施: 베풂)의원」을 설립해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고 빈민들을 구제했다

(1883-1884년).


▣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이었던 "의화단의 난"(1899-1901년)으로 개신교와 가톨릭, 동방 정교회 모두 탄압과 인명피해를 겪었다.

중국 동북부(만주)의 이권경쟁 때문에 "러일전쟁"(1904-1905년)이 일어났다.

*1907년 9월 17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노회'(초대 노회장은 마포삼열(Samuel A. Moffett)가 조직되었다. 1912년 1월 1일에 "중화 민국"이 선포되고 기독교인 쑨원(손문)이 초대 총통에 취임했다.

워치만 니(1903-1972년)는 중국인 감리교도로 본명은 ’니퉈성’. 부모 모두 미국 감리교회

소속 푸저우 톈안탕 교회 교인이었다. 중국 교회 자립 운동인 "소군교회"Local Church 운동(분리주의 성향의 극보수주의 교단)과 ‘사도시대의 회복’을 주장했다(1926년).

1949년에 "중화 인민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니퉈성은 정부 체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미등록교회를 자처했다.

◈ 중국 공산당이 창당(1921년)된 이후, 중국 정부는 사립학교와 사립병원의 이사회를 중국인으로 재편성하고 운영권을 인수했다. 선교사들은 평교사, 평의사, 평간호사로 근무. 반 기독교운동.

1951년에 "삼자회"가 설립되어 교회의 모든 활동이 중국 공산당의 통제를 받게 되자

3,000명 이상의 외국 선교사가 중국 대륙을 떠났다.

베이징 자립교회, 기독인 집회소, 예수가정 등은 삼자회와 갈라섰다.

1966-1976년에 발생한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주도한 사상 정화 운동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4대 악습"(문화, 사상, 관습, 습관)에 포함된 기독교 역시 홍위병들에 의해

큰 시련을 당했다. 덩샤오핑(등소평)이 집권(1978-1989년)하면서 종교적 온건노선을 택했고 가정교회가 크게 발전했다.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을 요구한 「천안문 사건」(1989년)의 영향으로 북미 중국학생들

사이에 기독교 열풍이 불어 신학원에 진학하는 인구가 증가했다.

시진핑 주석의 「전국 종교업무회의」(2016년) 석상 발언: "사회주의 사회에서 종교가 적응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교인들이 중국 공산당의 지도와 사회주의 제도를 옹호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할 수 있도록 지도하라."

2018년 2월부터 《종교사무조례 수정안》이 시행되었다.

정교의 분리를 주장하는 가정교회는 불법조직(재정, 집회 장소 등)으로 확정되었으며,

삼자교회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목회자를 교체한다. 중국공산당원에게는 종교가 허용되지 않으며 군대 내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최근 2020년에는 《종교단체관리방법》이 공표되어 인민정부 종교사무 부서의

심사와 동의를 거친 후 등록을 통해서 활동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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