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이 명성황후를 제거한 후 친일 내각은 군대를 동원해서 ‘단발령’을 시행했다. 고종은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고 러시아는 고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갖가지 이권을 차지했다. 친일 내각 대신 친러 내각이 세워졌고 피신했던 고종이 덕수궁으로 돌아왔다("1897년 2월"). 고종은 같은 해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조선이 자주 독립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름만 바뀌었을뿐 대한제국과 조선은 강대국들의 눈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한국명: 배위량, 1862-1931년)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1891년에 조선에 왔고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초량 교회설립). *권서인이던 서상륜과 순회 전도. "1895년" 대구에 ‘계성학당’을 설립한데 이어 "1897년"에 평양으로 이주해서 개설한 ‘숭실학당’은 "1906년"에 한국 최초의 근대 대학(대한제국이 인가한)인 ‘숭실대학’으로 발전되었다. 일본제국 강점기인 "1931년"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개교식에
참여한 지 한달 후에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3-1648년)을 처음 한국에 소개했다. 숭실대학은 신사 참배 반대로 "1937년"에 폐교를 겪기도 했다.
▣ 윌리엄 스왈른William L. Swallen(한국명: 소안론, 1865-1954년) 미북장로교회선교사. "1892년" 부인과 함께 조선에 온 이후 경성ㆍ평양ㆍ원산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1898년"에 스왈른에게 공식적인 선교 활동을 허락했다. "1901년"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임시 노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03년 1월" 모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신학교를 시작하였다. "1932년" 은퇴 후 귀국할 때까지 평양 선교부에서 33년간 성경연구와 선교활동에 힘썼다. 「찬송하는 소리 있어」(19장)와 「하늘 가는 밝은 길이」(493장)의 가사를 썼으며 대구와 황주에 사과나무를 보내기도 했다.
◈ 새뮤얼 모펫Samuel Austin Moffett(한국명: 마포삼열, 1864-1939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이며 교육자. "1890년" 조선에 와서 46년간 선교사로 생활. 평양에서 22명의 전도사들에게 성경을 가르친 것이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의 시작이었다. 현재는 ‘장로회신학대학교’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발전하였다. 모펫은 "1911년" 일본이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한 ‘105인 사건’ 때 미국 장로교회 본부 선교국에 보고하여 국제적인 여론을 일으키기도 했다. "1934년"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자 "1936년" 미국으로 돌아가 "1939년"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사망했다.
▣ 윌리엄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한국명: 매견지, 1861-1895년) 캐나다 선교사.
독립 선교사로 황해도 송현에서 선교. 송현은 "1895년" 서상륜, 서경조 등에 의해 외국인의 도움 없이 자체적인 힘과 수고로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진 곳이다. "1893년"에 조선에 입국한 맥켄지가 2년 만에 일사병으로 사망하자 충격을 받은 캐나다 장로교회는 "1898년"에 Grierson, Foote, McRae 세 명의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했다.
◈ ‘플리머스 형제단’(잉글랜드 자유교회) 소속의 브랜드 선교사가 "1898년"부터 수원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성서강당’, ‘기독 신우회’ 등의 소그룹 모임을 만들어 성경을
가르쳤고 한글로 「로마서」를 출간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후에 ‘수원동신교회’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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