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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 성경 공부 221강_소선지서로 만나는 하나님 (15) 스가랴-다섯 번째 이야기

 

9:1에서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12:1에서 두 번째로 ‘경고의 말씀’이 등장한다.

  

◈ 공격 당하는 예루살렘(12:1-8)

창조주’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힘이 되신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구원하시는 도구로

유다 지파를 사용하셔서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신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부어진다. 마치 요엘 2:28-29처럼.

그 결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찔린 자’를 위해서 통곡한다. 이 사람은 이사야 53장이 말하는 ‘고난의 종’과 동일 인물로 요한계시록 1:7은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힌다.

자기들이 찌른 바로 그 사람에 의해 구원 받았음을 깨닫고 통곡한다. 이것이 ‘은혜

받았다.’는 말의 바른 정의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은혜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13:1)


▣ 예루살렘을 죄, 우상,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깨끗하게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13:1-6)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졌다. ‘창조주’ 여호와에서 ‘만군의’ 여호와로. 군대와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깨끗하게 되는 것은 전쟁의 결과다.

마태복음 21:12-13에서 예수님은 ‘만군의’ 여호와로서 일하셨다.

① 내쫓고 ② 둘러 엎고 ③ 꾸짖는다.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통곡했다고 죄가 사해지지는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깨끗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유다를 사용하셨듯이 샘을 사용하신다.

13:2의 ‘더러운 귀신’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만군의 여호와 앞에 선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은 선지자가 아니라 농부라고 변명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거짓말, 환상, 털옷, 팔 사이에 있는 *상처(열왕기상 18:28 참고)

등이다.


◈ 두들겨 맞는 목자와 남은 자들(13:7-9)

이 목자는 여호와의 ‘’이며 ‘동료’이다. 왕이나 대제사장처럼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이 목자로 여기셨다. 이런 목자를 칼로

친다면 양들은 모두 흩어질 것이다. 그러면 작은 자들, 즉 소수의 사람들만 고난에서

살아남게 된다. 2/3는 멸망하고 1/3은 남게 될텐데 남은 사람들은 불 가운데서 연단을

거쳐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 예루살렘에서의 전쟁(14:1-5)

전쟁은 여호와의 날에 벌어진다. 여호와는 역사와 세계 만민을 다스리신다.

이 전쟁은 악의 세력과 벌이는 전우주적인 전쟁이다. [그런데 이방 나라들을 모으시는

분이 다름 아닌 여호와이시다. 예루살렘의 절반이 사로잡히고 나서야 여호와는 이방

나라들을 치신다.]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여호와는 감람산에 서신다. 이곳은 기도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장소다.

남은 자들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 당장은 도망의 길이겠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왕과 행진하게 될 길이다.     


◈ 새 예루살렘(14:6-11)

새로운 도시 예루살렘의 경계는 유다 지파의 경계선과 같아진다(14:10).

예루살렘에서 유다로 경계가 확장되는 이 놀라운 경험은 제자들이 성령의 인도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사도행전 1:8).

그 곳에는 더 이상 ‘저주’(헤렘: 전쟁에서 포로들을 죽이는 행위)가 없다.

요한계시록 22:3도 이 모습을 강조한다. 마침내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자들에게 내릴 재앙(14:12-15)

① 살과 눈동자와 혀가 썩는다. ② 서로를 붙잡고 손으로 때린다.

방금 전까지 한 편이었을텐데 이제 서로를 탓하며 싸우다가 멸망한다.

참 이상한 것은 새 예루살렘 이야기에서 빠지면 안 되는 ‘성전’에 대한 말이 없다.

요한계시록 21:22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성전’ 이야기는 빠져 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스가랴서의 결론이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진정한 성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이다.

이방의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초막절’을 지킨다. 이제 구원은 유대인만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마지막 때에 만물은 거룩하게 된다. 제사장의 예복에 두르는 정금 패나 말에게 다는 방울이같이 거룩하다? 이제 사람이 정해 놓은 ‘구별됨’은 더이상 필요 없다.

하나님이 만물을 거룩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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