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선교국"(미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과
"식민국"(일본)이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 1910년에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민족주의와 결합한 기독교 탄압을 위해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1911년)을 꾸며서 ‘105인’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해체되었다. 성장을 멈춘 듯 했던 교회는 만주와 해외로 퍼져나갔다.
◈ 맥큔 George Shannon McCune(1873-1941년; 한국명 윤산온)
미주리 주립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905년 대한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평양 숭실학교와 지역 교회에서 활동했다. 1909년부터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105인 사건’(1911년)으로 구속되자 이 사건을
미국 선교부에 보고하고 일제의 무단통치 실상을 외국 언론에 알렸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고
일본 경찰의 가택 수색을 거부했다. 1920년 미국 의원단이 방한했을 때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보이기 위해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신성학교 학생 박치의가 사형판결을
받자 변호를 맡았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1921년 미국으로 갔다가 1928년에 돌아와
평양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했다. 1930년부터 일제는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맥큔은 계속 거부하다가 1938년 자진 폐교를 선택했다.
1941년 시카고의 장로회 병원에서 사망했다.
▣ 첫 노회가 열린지 5년 만인 "1912년 9월 2일" 평양신학교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총회에는 7개 노회에서 221명의 회원(52명의 목사, 125명의 장로,
44명의 선교사)이 참석했다. 5년 만에 교인은 75,968명에서 127,228 명으로, 교회는 785개에서 2,054개로 증가했다. 총회장에 원두우(Underwood) 선교사, 부총회장에 길선주 목사, 서기에 한석진 목사, 회계에 방위량(Blair) 선교사가 선출되었다.
◈ "1915년" 일제는 사립학교규칙을 대폭 수정한 「개정사립학교규칙」을 시행하여 교사의 자격 조건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보통 교육, 실업 교육, 전문 교육을 담당하는 사립학교
교사는 일본어에 능통해야 하고 담당 학과에 대한 학력이 있는 자로 했다. 초등보통교육을 하는 사립학교 교사 역시 사립학교 교원 시험에 합격한 자, 조선 총독(당시 데라우치 마사타케)이 지정한 학교를 졸업한 자, 일본 본토의 문부성에서 발급한 준교원 면허증이 있는 자로 제한했다. 기독교 학교의 경우, 예배와 성경 공부를금지했으며 신사참배를 요구했고
유예 기간을 10년으로 정했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에 대해 *감리교와 장로교는 다른 대응을 보였다. 장로교의 경우 학교의 인가 신청을 포기했기 때문에 1919년 기준, 장로교 사립학교는 1908년의 796개에서 298개로 감소했다.그러나 장로교인의 숫자는 1918년 기준, 16만여 명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박해는 교회를 성장시켰고 일제에 대항하게 했다.
▣ 제 1차 세계 대전: ‘삼국협상’(영국, 프랑스, 러시아)과 ‘삼국동맹’(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전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유럽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세계 대전’이라는 이름처럼 '협상국'에 이탈리아, 미국, 일본, 인도, 대만, 브라질, 파나마등이 가담했으며,
'동맹국' 편으로 불가리아,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이 참전했다. 일본과 호주 사이에 위치한 미크로네시아 독일령 식민지를 차지할 목적으로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300 여명의 사상자만을 내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서의 권리를 얻었다. 전쟁 도중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1917년)으로 붕괴되었으며, 1918년 '독일 11월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폐지되고
연합국이 최종 승리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인도(영국의 지배: 1858-1947년)와 한국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나 인도는 1947년, 한국은 1945년에 가서야 독립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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