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한 고종이 "1919년 1월" 덕수궁에서 사망했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맞춘 독립 시위 계획이 탄로나자 3월 1일로 날짜를 변경했다.
‘신분제도 폐지’를 주장했던 동학농민운동(1894-1895년)의 정신을 이어 받은 천도교가
시위를 주도했으나 비폭력 운동임을 확인한 기독교의 참여로 오히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나 포함되었다(천도교 15명, 불교 2명).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에게 영향을 받았던 기독교인 최남선이 「독립 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다. "정의· 자유· 독립" 등은 당시 조선에는 없던 말인데 기독교가 전해준
개념들이었다. 이후 두달 동안 1,500회 이상의 시위에 200만 여명이 참여했다.
당시 전단 내용에는 일본인을 모욕하거나 폭력을 행하지 말고 기도와 말씀 묵상에 전념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 유관순(1902-1920년)은 1916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사 애리시Alice Sharp(‘사부인’이라고 불림)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했다. 1919년에는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으며 주일에는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다. 같은 해 3.1 운동에 참여했고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4월 1일 ‘아우내 (병천) 장터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었다. 공주 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일제의
고문과 구타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 3.1만세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것에 대해 안팎에서 비판을 듣게 된 일제는 이후 정책의 방향을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었다. 헌병제를 폐지하는 대신 경찰제를 실시했으며, 한글 신문을 허가하고 한국인을 차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교회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었으며,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 교육과 종교의식(예배)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문화정치’의 목적은 예배와 수업을 참관하고, 신문과 잡지 등을 검열, 삭제, 압수, 정간,
폐간 함으로써 일본에 협력하는 사람과 끝까지 저항하는 사람을 구별해내고 분열시키기
위함이었다.
◈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통치와 함께 향락 문화(아편, 공창: 1916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국가가 운영하는 성매매 제도)가 한반도에 들어왔다. 음주와 흡연 퇴치를 주장했던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 기독교는 이화학당 교사 손정규를 중심으로 "1924년"에
<조선 여자 기독교 절제 연합회>를 결성했다. 금주, 금연을 시작으로 민족 정신의 계몽에
힘쓰는 한편, 실용적인 생활을 추구했다. 이후 감리교가 ‘조선 기독교 여자 절제회’를,
장로교가 ‘조선 기독교 절제회’를 설립했다. 1908년부터 선교를 시작했던 구세군은
초기부터 금주와 금연 운동을 강력하게 벌여나갔다.
▣ "1934년"은 미국 장로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한 지 50년(희년)이 되는 해였다. 교회는
5천개, 성도는 37만명으로 성장했으나 희년을 기념하는 한반도의 상황은 ‘자유주의 신학’과 ‘이단의 등장’으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시기이기도 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날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1933-1935년 무렵 교회의 분위기는
‘성장도 하고 있고 부흥 운동은 벌이는데 전도는 약해지고 있다.’(평양 산정현 교회 송창근
목사), ‘교회가 점점 경제화, 자본화 되어가고 있다.’(평양 창동교회 김화식 목사)는 말처럼
여기저기서 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비주의적 이단도 등장했다.
이용도, 유명화(이상 감리교인), 황국주(장로교인. 나중에 문선명, 박태선, 이만희로 이어짐), 백남주, 한준명 등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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