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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기독교의 만남 : 1627년~1897년 (3)

▣ 미국의 선교사들이 조선을 향할 수 있었던 것은 제 2차 대각성 운동(1790-1840년:찰스 피니의 *반지성주의 운동) + 무디의 부흥 운동(1858년 이후) + 조·미 수교("1882년": 조선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 + 견미사절단 가우처 목사와의 우연한 만남 등

여러 역사적 상황들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을 복음과 만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은

그 분의 섭리providence 안에서 모든 일들을 진행하고 계셨다.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1845-1922년)는 북감리교회 목회자이다. "1883년"

민영익이 포함된 조선의 사절단을 대륙 횡단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후 조선 선교의

열정을 품게 되었다. 선교 헌금 2천 불을 받은 후에도 감리교 선교 본부는 무반응이었고,

가우처는 일본 주재 선교사였던 매클레이에게 조선 답사를 부탁했다. 1884년 6월, 매클레이가 조선에 도착했고 결과적으로 이 과정이 아펜젤러스크랜턴 선교사의 조선 선교사 파송(1885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1880년대 미국 *학생 자원 운동의 영향으로 조선으로 향했던 젊은 선교사들은 열정은

넘쳤던 반면, 선교에 대한 경험과 정책이 부족했다. "1890년" 에 언더우드 선교사의 초대로 중국 산동성 즈푸에 있던 네비우스John L. Nevius(1829-1893년)선교사가 서울을 방문해서 자신의 선교정책을 강의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자진 전도, 자력 운영(교회당), 자주 치리(조직)의 ‘세 가지의 자립’(3자)이 핵심이었다.

   

◈ 청일 전쟁(1894.7.-1895.4.) 당시 조선을 둘러싼 강대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미국이었다. 일본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다. "1894년" 조선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했다. 일본 역시 조선에 군대를 파병.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다시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내려고 했다.

일본 공사 미우라가 명성황후를 암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 친일 성격의 ‘김홍집 내각’이

세워졌다.


▣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장로교를 국교로 삼고 미국과의

관계를 이어가려 했다. 가장 가까이 지내던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궁궐의 모든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장로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여서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러시아와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있을지를 물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회의 *정교분리 원칙을 설명하고 고종의 제의를 거절했다.  


◈ 백성을 계몽하고 조선을 근대 국가로 바꾸려는 젊은 개화파들(이완용,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이 "1896년"에 ‘독립협회’를 만들었다. 민중의 정치 참여를 주장했으며 강대국의 조선 주권 침탈에는 저항했다. 백정과 노비까지도 ‘만민공동회’(토론 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1897년" 고종이 대한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자주 국가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으나

왕정을 포기하고 민주적 공화제로 가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독립협회’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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