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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Admin

해방 이후의 기독교 : 1945년~ (2)

▣ 신사참배 회개 운동은 북한에서는 홍택기, 남한에서는 김길창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46년 12월 경남노회는 같은 해 9월 세워진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 때 노회장이 김길창이었다.

한상동 등이 노회탈퇴를 선언하자 1947년 정기 노회가 고려신학교를 인정하면서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1948년 박형룡이 고려신학교를 사임한 후 서울에 ‘장로회 신학교’를

세우면서 고려신학교에 대한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경남노회는 임시노회를 열고 고려신학교에 대한 노회의 기존 입장을 철회해 버렸다.


◈ 김길창(1892-1977년) 경상남도 고성 출생.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경남 노회소속. 1933년 부산 ‘항서교회’에 부임해서 33년간 재직했다. "제27회 총회"(1938년)가 신사참배를 결의했을 때 부회장으로 결정을 이끌었고, 총회 직후에는 노회 임원들과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신사참배 찬성과 실천 뿐 아니라 반대자들을 고발한 혐의로 광복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 처벌법>에 의해 체포되었다. 기소 의견서에는 교인의 *황민화(일본 황제의

백성이라는 뜻)를 앞장서서 추진했고, 신사참배로 민족 정신을 말살했으며, 경찰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 목사와 교인을 탄압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반민특위 습격사건’ 이후 기소유예로 풀려나 학교재단설립과 운영 등 교육계에서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의 행적에 대해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2002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2008년),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2009년) 등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박윤선(1905-1988년) 평안북도 철산 출생. 1927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 193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마치고

귀국했다. 1945년 8월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6년 2월 월남하여 한상동과 함께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설립, 교장을 맡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경남노회가 쫓겨나자 1952년 9월 총노회(고려파)를 조직했다. 이것이 장로교의 '1차 분열'이다. 1960년 9월

고려신학교를 사임하고 고려파를 떠나 1961년 2월 서울 동산교회를 담임했다.

1980년 11월 총신대학 대학원장을 사임하고 교단을 탈퇴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신’을 조직하고 교단 신학교인 ‘합동신학원’을 수원에 설립하여 초대 원장을 맡았다.


◈ ‘1차 분열’ 1년 후인 1953년, 교계의 보수적 목사들이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조선신학교 출신의 목사들을 성서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문자적 영감설이라고도 하며 기독교 근본주의적 성경관)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공격했다.

"제38회 총회"(1953년)는 김재준을 장로교 목사직에서 파면하고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통합해 새로운 교단 신학교를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계열의 목사들이 이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총회는 조선신학교 신학생들의 목사 안수도

거부했다. 이에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설립되었다. 기장은

민중신학을 중심으로 반독재 민주화투쟁, 인권, 노동, 통일운동, 촛불집회에 적극 참여했다.


▣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는 1948년에 세워진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컬 운동) 단체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이라는 한 가지 구원론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 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종교가 없는 사람을 구원하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그들의 말처럼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주장하며 ‘개종 전도’를 금지한다.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국 북장로교회가 WCC의 설립에 앞장섰다.

"제44 회 총회"(1959년)에서 WCC 가입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의견이 나뉘어 한경직이

중심인 찬성파는 연동교회에서, 박형룡을 중심으로 반대파는 승동교회에서 각각 총회를

열었다. 이후 연동 측을 ‘통합’으로, 승동 측을 ‘합동’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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