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 조찬 기도회’는 교회가 정권과 결탁한 대표적인 행사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1966년에 시작된 기도회는 박정희의 *유신 체제(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대통령이 모두
쥐고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1인 대통령제)와 전두환 신군부 독재의 정당성을
국내외에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하면서 ‘정교 분리’의 원칙이 ‘정교 일치’로 변해가는 계기가 되었다.
C.C.C.의 설립자 김준곤 목사는 1973년 5월 대통령 조찬기도회 설교에서, "외람되지만
각하(박정희)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全軍) 신자화 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만일 전민족 신자화 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만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길자연 목사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이던 2011년3월의 국가조찬기도회 당시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윤옥 여사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이 장면은 정권과
대형화·정치화된 교회와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 "제44 회 총회"(1959년)에서 WCC 가입 문제로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한경직목사가
중심인 가입 찬성파가 연동교회에서, 박형룡 박사가 중심인 가입 반대파가 승동교회에서
각각 총회를 열고 ‘통합총회’와 ‘합동총회’로 분리되었다.
이 때 김치선 목사가 ‘대신총회’(1961년)를 세우고 사회 참여와 애국을 강조했다.
박형룡 박사는1960년에 고신교회 목회자들을 만나 다시 연합할 것을 제안하고 추진했으나 ‘고려신학교의 폐지’ 결정에 대해 고신 측이 반발했고, 1963년 9월 고신측 교회들은
다시 분리된 상태로 돌아가는 ‘환원’restoration을 선언했다.
‘합동총회’와 연합을 추진했던 고신 측 지도자들은 은퇴(한상동 목사 등)와 사죄 후에
1년간의 자숙을 결의했다.
▣ 교회는 성장의 동력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70년대 한국에서는 대형 기독교 집회들이 열렸고 엄청난 외적 결과를 낳았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초청 집회’에는 총 440만 명이 참석하고 10만 명이 결신했다.
1974년 엑스플로 74’에는 655만 명이 참석하고 20만 명이 거리 전도에 나섰다.
평양대부흥 70주년이던 1977년에는 ‘민족 복음화 성회’가 열려 650만 명이 참석하고
수십 만 명이 철야기도를 드렸다.
1974년부터 대형 집회에는 유명 연예인들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1980년 ‘세계 복음화대회’는 8월 11일~15일 동안 1,050만 명이 모였고 70만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교회는 같은 해 5월에 발생한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대중과 청중 중심의 메시지, 전도와 선교를 위한 결단,
유명인을 통한 마케팅 등의 결과로 나타난 교회의 양적 성장은 1995년까지 계속되었다.
◈ 마태복음 28:19-20 The Great Commission이야기.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제자로 삼는 일(전도, 선교)은 모든 교회가 동의하는 대사명이기에 세례를 베푸는 일 역시 교회의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이다(결신). 그러나 세례 이후에 필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삶에서 지켜내는 일이다. 제자를 삼으러 나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서 성경의
가르침(신앙고백, 교리 등)을 배우고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여전히 전도와 선교는
중요하지만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일이 삶에서 드러나는 전도와 선교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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