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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Admin

목요 성경 공부 214강 : 소선지서로 만나는 하나님 (8) 아모스-네 번째 이야기

▣ 이스라엘에 내리셨던 다섯 가지 재앙들(4:6-11)은 뒤로 갈수록 심각하다.

① 기근으로 양식이 떨어짐  ② 추수 석 달 전에 비가 멈춤 

③ 곡식이 마르고 깜부기(이삭이 까맣게 변함)와 팥중이(메뚜기)가 생김 

④ 전염병과 칼로 죽음 말들을 빼앗김, 악취 

⑤ 불과 유황(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질 때와 같은)  

다섯 가지 재앙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재앙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을 부르고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돌아갔어야만 했다.


◈ 하나님의 교육방법(4:12-13;5:1-3)

하나님은 이제 방법을 바꾸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행동을 아버지가 하시는 것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오신다. 마치 타국에 갔던 포도원 주인처럼.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 만유의 주’이시다. 이스라엘은 ‘아버지’ 하나님 대신에 바로

이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알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다리신다(5:4-7)

아모스는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그분을 찾으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거짓 예배의 장소(벧엘과 길갈)를 포기해야 한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5:4)

하나님을 찾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만날 준비는 ① 우상과 위선을 버리고  ② 기도하고  ③ 말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살기 시작할 것이다.


◈ 정의 Justice

공식적인 예배(5:21-26)는 있었지만 절기와 의식들은 완전히 잘못 지켜지고 있었다.

무교병 대신 누룩을 빵에 넣어 불살랐으며(4:5의 수은제), 어린 양을 잡는 시간도 자신들의 편의에 의해 바꾸었다. 그럼에도 절기와 의식을 유지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 이스라엘의 주장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제물의 상태를 문제 삼았지만(말라기 1:8) 아모스는 하나님이 아예 제물 자체를 쳐다보지도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기에 적합한 백성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정의와 공의가 실종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감사를 받지

않으신다(누가복음18:10-14). 불의와 폭력을 저지르는 백성의 제물(헌금), 노랫소리,

비파소리(찬양)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우리의 예배

예배자는 삶에서 진실해야 한다. 헌금과 찬양이 내 잘못을 덮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 뜻에 미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삶 속에서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면서 드려져야 한다. 그래야 받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정의란 무엇일까?

식굿(5:26)은 바벨론의 신이며 동시에 우상 숭배를 위한 장막(장소)을 의미한다.

기윤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우상 바알브올(모압에서 시작. 민수기 25:3)의 다른 이름이며

우상을 세우는 받침대를  부르는 명칭이기도 하다. 장막부터 그 받침대까지 모두 버려야

살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내 삶의 받침대라고 생각하는가? 돈인가? 아니면 명예인가?

 

◈ 하나님은 절기나 제물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희생 제사와 제물 없이도 살았던 광야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가나안에서 사회적인 불평등과 불의가 생겨났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노예가 되게 하실 것을 결정하셨다. It's time to reset!!

형벌은 해방시켜 주실 약속까지도 포함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정의’다. 어렵다! 일반적으로 재판에서 정죄하는 정의(미슈파트)와 은혜로 사면하는 정의(체다카)가 합해져야 하나님의 정의가 된다. 하나님은 살리기 위해서 판단(재판하고 동시에 사면하는)하신다.

유죄이거나 무죄이거나, 죄인이거나 의인이거나 이 모든 판단은 재판하시고 동시에

사면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정의는 약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죄하는 정의(미슈파트)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마태복음 20:14-16에 나오는 집 주인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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