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1723-1794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 장로교 목사로 본명은 John Knox Witherspoon이다.
아버지와 장인 역시 장로교 목사였다. 13세에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했고 "1745년" 22세 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768년" 프린스턴 대학의 6대 총장으로 청빙을 받아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계몽주의(도덕철학, 수사학)를 전파한 영향으로 프린스턴 졸업생의 목회자 지원 비율이 떨어졌다. 정치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다.
"1776년" 미국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다(feat.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새뮤얼
애덤스 등과 함께) "1789년" 필라델피아 제2 장로교회에서 열린 PCUSA 첫 번째 총회의
사회자였다.
비판: 위더스푼은 미국으로 온 후에 칼뱅의 개혁주의를 벗어나 계몽주의 사상으로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이신론, 신앙의 자유, 종교적 관용, 교권으로부터의 해방 등이
계몽주의의 핵심 사상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나 직접적으로 세상 역사에 관여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신론 사상의 뼈대이다.
◈ "1741년"의 장로교회 1차 분열은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들(회중교회의 부흥운동)에 대해
해석이 달랐던 장로교회 내부의 두 그룹(Old side와 New side) 사이에 벌어진 문제였다.
이에 비해서, "1837년"의 2차 분열은 장로교회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들(회중교회와 장로교회의 통합; 2차 대각성으로 인한 교회의 부흥)을 신학적으로 다르게 보는
두 학파(Old school과 New school)의 갈등이었다.
칼뱅의 개혁주의(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를 지지하는 구학파와
알미니우스의 신학(핵심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결단)을 지지하는 신학파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여기에 노예제도에 대한 입장이 달랐던 남부와 북부의 전쟁으로 장로교회는
모두 네 개의 입장으로 갈라지게 된다.
▣ 제 1차 세계 대전(1914-1918년)
미국 장로교회는 전쟁이 벌어지자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의 ‘중립 선언’을 지지했다.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으며 유럽의 물질 만능주의, 부도덕,
영적인 생활에 소홀함을 전쟁의 이유라고 생각했다.
"1916년" 미국 장로교 목회자들 대다수가 자기 방어를 위한 무장에 찬성했으며
"1917년"부터 예배당 안에 기독교 깃발과 성조기를 함께 두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태도나 중립적 태도가 사라지고 전쟁을 인정하게 되면서부터
교회는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해야만 했다.
◈ 어번 선언Auburn Affirmation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PCUSA는 성경의 무오설, 예수의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기적, 육체의 부활 등 다섯 가지를 기본 교리로 정하고 목사후보생들에게 서명하게 했다.
자유주의가 퍼지던 당시 이 다섯 가지 교리를 믿으려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뉴욕의 어번
신학교에 모여서 ‘이 다섯 가지는 사람이 만든 교리로서 반드시 믿을 필요는 없다.’고
쓴 문서에 서명했다.
"1924년" 1월에 모인 장로교 목사 150명이 서명했고, 5월에 모인 제2차 모임에서는
무려 1,274명이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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