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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Admin

일제 강점기의 기독교 : 1910년~1945년 (3)

▣ 미국발 대공황(1929-1939년)의 영향으로 경제 위기가 닥치자 일제는 대륙침략정책을

다시 추진했다. "1915년"에 10년간 유예 기간을 두기로 했었던 신사참배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강요되었다. 이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다.

 

• 주기철(1897-1944년) 장로교 목사.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표적인 인물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26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1936년에 은사 조만식으로부터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을 요청받았다.

1939년 12월 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는 신사참배 결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기철을 목사직에서 파면했다. 1940년 9월에 일제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순교했다.


• 최상림(1888-1945년) 장로교 목사. 1926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동래교회에 부임했다. 1938년 6월 부산 해운대교회에서

열린 제41차 경남노회의 노회장이었으며 이때 공식적이며 유일하게 ‘신사참배 반대’를

노회가 결의했다. 1938년 10월부터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시작했을 때,

남해를 중심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수감 중이던 1945년, 해방을 석 달 앞두고 고문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순교했다.


• 한상동(1901-1976년) 장로교 목사. 실용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24년, 전도인

박창근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 가문에서 영구 출문을 당했다. 1937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10월 24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했다. 이때부터 경남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압력으로 1939년 3월에

교회를 사임하고 무임 목사가 되었다. 이후 주기철 목사와 함께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출옥한 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교회재건을 위한 부흥회를 인도했으나 공산당의 방해로 1946년 초 남한으로 내려왔다. 1946년 6월 진해에서 신학강좌를

개최했는데 이것이 <고려신학대학교>의 시작이다.


◈ 신사참배에 대해 안식교(1935년), 성결교, 감리교(1936년 1월), 구세군, 성공회, 로마

천주교(1936년 5월)가 차례로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다음 날 장로회 총회의 총대인 노회장 23명이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1939년 총회부터는 ‘국민의례’가 시행되었다. 1940년 총회는 미국 의존적이었던

기독교에서 일본의 기독교를 따르기로 결의했다. 일제가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같은 해 11월 16일 하루에만 선교사 219명이 한국을 떠났다. 1942년 제31회

총회를 끝으로 ‘조선 예수교장로회’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통합되었다(1943년).   

▣ 해방 후인 1945년 9월 20일 장로교회 재건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이 제시되었다.

1. 교회의 지도자(목사, 장로)가 모두 신사에 참배했으므로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성화한 후에 사역에 임한다.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의 경우 최소 2개월 동안 휴직하고 통회

자복한다.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한다.

4. 위 1~3 항의 ‘교회 재건 기본 원칙’을 각 노회와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이것을 

시행하게 한다.

5.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복구한다.             

Q. 과연 이 다섯 가지 원칙을 통해 장로교회는 재건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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