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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특강: 중국과 기독교의 만남

기독교 5대 교구"로는 로마/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안디옥/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386-451년)는 ㆍ *시리아 안디옥(행 11:19-30) 출신 설교자였으며 ㆍ 삼위일체 교리를 주장한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했다. ㆍ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루스와는 철학적인 이유에서 적대적인 관계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플라톤 철학에, 안디옥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바탕을 두고 있었다. 두 학파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의 문제로 대립했다. "Theo-tokos"(하나님의 어머니) vs. "Christo-tokos"(그리스도의 어머니)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 네스토리우스의 생각이었으나 익숙하지 않은 호칭(크리스토-토코스)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테오도시우스 2세(동로마)와 발렌티아누스 3세(서로마)가 에베소 공의회를 소집했다(431년) 키릴루스와 에베소의 주교였던 멤논이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주교직에서 파문당한 네스토리우스는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추방당했다.

이 때 안디옥 교구로부터 "*키프로스(구브로: 행 13:4) 정교회"(바나바에게서시작된)가 독립했다. 이라크의 아시리아 동방교회, 인도의 도마 교회(말라바르 지역) 등이 네스토리우스파를 계승했다.


▣ 《첫 번째 만남》 사산 왕조 페르시아(224-651년)의 네스토리우스파 주교 올로푼 당나라(618-907년. 수도: 장안) 태종 때 기독교를 전파했다(635년). 당시 이슬람은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년)였고, 638년에는 칼리프 오마르가 예루살렘을 함락했으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 역시 이슬람 제국에게 멸망당했다.

올로푼(중국명: 아라본)은 당의 황실에서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638년 태종에 의해

"경교"(의미: 빛의 신앙)는 국가 공인 종교가 되었고, 예배당은 ‘대진사’(의미: 로마의 교회)

라고 불렀다. 숙종의 재위 기간(756-761년)에는 매년 경건 수련회가 개최되었다.

덕종이 재위했던 781년에는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가 세워졌다.

845년 무렵, 당나라 전국에는 46,000개의 예배당과 26만 명에 달하는 성직자가 있었으나,

이후 도교를 숭상한 왕실에 의해 「박해령」이 반포되었다.

당나라 말기인 879년에는 "황소의 난"(농민 반란)이 일어나 선교사와 교인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박해로 흩어진 경교는 고구려, 신라, 발해, 일본, 몽골족 등에게 전해졌고,

몽골제국이 원나라(1271-1388년. 수도: 베이징)를 세우면서 함께 부흥했다가 원의 멸망과

함께 명나라 초에는 중국 대륙에서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 중국에서 경교가 뿌리 내리지 못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 중국이 가지고 있던 유교, 불교, 도교와 민간신앙의 단단한 종교 체계를 극복하지 못함 • 황실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위에서 아래로’ 복음을 전한 선교 방식이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함


송나라(960-1279년)는 유교의 틀을 세우면서 도교, 불교, 조상신 숭배가 주를 이루었다.

동로마 제국 대사가 황제를 접견했으며(1081년) 중동의 무슬림, 유대인, 페르시아인이

송나라에 정착했다.


◈ 《두 번째 만남》 칭기즈 칸이 몽골제국을 세워(1206년) 중앙 아시아와 중국 대륙을 제패하고 중동과 유럽까지 진출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1271년에 국호를 「원」Yuan으로 바꾸고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원나라는 몽골인과 색목인이 지배층을, 한족이 피지배층을 형성했다.

원나라는 중국의 전통 문화를 무시했으며 원 왕실은 *색목인과 그들의 종교에 관대했다.

마르코 폴로는 1275-1292년까지 원나라의 관리로 일하며 중국과 아시아 국가들을

돌아보았다. 《동방견문록》 이슬람 문화가 활발하게 유입되었으며 경교가 재등장했다. 케라이트 족, 나이만 족, 메르키드 족, 옹구트 족은 부족 전체가 경교 신도였다.

1245년 당시 경교 교회 7개가 건축되었다. 북경에만 3만여 명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으며

이들은 병역을 면제받았고 면세 특권을 누렸다. 몽골의 기마부대에 위협을 느낀 유럽

국가들은 교황이었던 이노센시오 4세를 중심으로 몽골과의 화친을 시도했다(제 7차 십자군 원정과 시기가 겹침) 가톨릭 신부들이 몽골에 도착(1246년) 3대 칸의 즉위식에서 경교

신자들의 환영을 받음. 유럽 침략 중단을 권고하는 교황의 편지가 황제에게 전해졌으나

‘우리(몽골)도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온 대륙을 휩쓸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로마 가톨릭은 자신들이 파문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또 원나라와의 만남을 통해

유럽 중심의 생각에서 크게 흔들린다. 경교 신자로서 예루살렘 순례를 떠난 *위구르족

바르 사우마의 요청으로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선교사 몬테 코르비노를 몽골에 파송

(1294년). 경교 신자였던 황제 테무르 칸(쿠빌라이의 손자)을 만남. 경교 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과 시편을 몽골어로 번역. 쿠빌라이의 외손자 고리지스가 경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 후 중국 최초의 신부 서품을 받았다. 1328년 당시 중국의 가톨릭 신자는

1만여 명에 달했다.

▣ 《세 번째 만남》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내부의 반성으로 예수회가 생겨났다(1534년). 중국 선교의 당면 과제는 "번역"이었고 이를 위해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가톨릭 신부들이 헌신했다. ‘하나님을 어떻게 현지의 언어로 전달할 것인가?’ 미켈레 루지에리가 하나님을 ‘천주’天主라는 한자어로 정착시켰다. 1601년 명나라의 신종을 만난 마테오 리치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시계)을 전하고 포교를 허락받았다. 서광계와 이지조 등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한족이 세운 정권으로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라 기본적으로 서구의

과학은 수용하고 종교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1616년 신종은 그리스도교 포교를 금지하고

선교사들을 마카오로 추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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