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 성경 공부 241강 : 신구약 중간사 (3) - 제 2 성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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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는 많은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 2:1-67;
□ 느헤미야 7:6-69)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노비까지 포함하면 약 오만 명이었다.
이들은 유대 공동체에서 소수였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멀었을까?
◈ "베히스툰 비문"(이란의 베히스툰 산 절벽에 새겨져 있는)내용은 바사의 *다리오 대왕이 애굽과 바벨론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것이다. 이 다리오는 B.C.492년에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 군대와 격돌했던 인물로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할 당시 바사 제국의 왕이었다.
‘강 건너 지방’에도 처음에는 스룹바벨을 총독으로 파견했지만, 다시 ‘닷드내’(에스라 5:3)를 보내서 유대인들을 견제하고 감시했다. 따라서 제 2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는 다르게
바사가 다스리는 지방의 종교적 중심으로서의 기능만 담당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중심은 각 지역의 ‘회당’이었다.
포로 귀환 이후 히브리어는 거의 소멸되었고 율법의 보존을 위해 ‘서기관’이라는
전문적인 계층이 등장했다.
▣ B.C.458년 무렵에 아론의 후손인 ‘서기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유대로 돌아왔다(제 2차 포로 귀환 때). 에스라의 사명은 유대 지역에 종교적 시스템을 세우고, 율법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에스라의 뒤를 이어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B.C.445년에 성벽 재건을 위해서 유대로 파견된다(제 3차 포로 귀환 때).
성전이 세워지고 ‘70년’이 지나서야 성벽이 세워진 것이다.
이 시기에 사마리아의 간섭과 방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바사 제국 관리로서의 임무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인 안정과 세금 징수였다.
◈ 오늘날 기독교가 외치는 ‘회복’은 교파나 교회의 양적인 증가에 치우쳐 있지만,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외친 ‘회복’은 영적인 회복과 사회적인 회복이었다.
이 시기에 흩어져 있던 성경들이 수집되고, 편집되었고, 체계화되었다.
회복의 중심에는 말씀이 자리잡아야 한다. 말씀에 근거한 ‘개혁’은 바사 제국 내에서
사회적인 고립과 단절을 무릅써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